전우들과 만남

2011년 전우모임을 송계계곡에서 (청풍명월 편)

돌풍56 2011. 8. 25. 01:00

 

마지막  " 청풍명월 편 " 입니다

 

청풍문화재단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가 기름진 들을 차지하기 위해 자주 다투었고 육로 못지않게 수운이 발달하여 강변에 인구가 집중되었다. 특히 청풍은 남한강 상류에

자리잡은 고읍으로 신라시대에는 나제군의 영현이었고, 고려 시대에는 충주목에 예속되어 감무(監務, 고려말부터 조선초까지 작은 현의 원을 일컬음)를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수운의 요충지로 도호부를 두었기 때문에 선사시대부터 근세에 이르는 많은 문화유적을 간직해 왔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과 국운의 융성함에 따라 충주다목적댐이 건설되니 이곳은 물에 묻히게 되었다. 이에 충북에서는 한국산업산업기지개발공사의 지원을 받아 이 지역 안에 있는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하여 1980년에 수몰대상 지역 안의 문화유적을 지표 조사하였으며 1983년과 1985년 3개년에 걸쳐 고고 분야 33지구, 역사 분야 10지구, 불적 분야 5지구 등 48개 지구를 선정, 학계로 하여금 발굴조사 하였고 36건의 유형 문화재를 이전하였다. 이 단지의 규모는 총 16,482평으로 청풍면 안에 있는 문화재 가운데 수몰로 이전이 불가피한 문화재와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중요한 지석묘 등  한곳에 이전하여 한강변의 거석문화재를 한눈에 볼수 있게 배치하였다. 1983년에는 한벽루를 비롯한 5동의 관아 건물과 청풍향교, 불상 그리고 전통적 양식을 갖춘 민가 4동과 비석 등 중요문화재를 이전 완료하였다. 비록 원위치는 물속에 잠겼지만 유형문화재는 원형을 보존하고 건물의 방향과 거리를 원형에

맞추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고 안내판에 쓰여 있다.

 

충주호 제일의 명소인 청풍명월 문화단지를 찾아갔더니 주차장 입구에는 꽃이 만발한 언덕이 시선을 사로잡고 

 

청풍 도화리 고가
이 집은 본래 청풍면 도화리에 있었던 민가였다.충주댐의 건설로 198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조선말기에 지어진 ㄷ자형의 우진각 기와집이다.중앙에는 3칸크기의 대청을 이루고, 좌측 간살은 방, 부엌, 광으로,우측 간살은 방2칸과 2칸 크기의 부엌으로 되어 있다. 둥근통나무 굴뚝과 부엌 살자창옆의 관솔을 피워 어둠을 밝히는 시설은 태백산맥 일대의 산간지대 민가에서 볼 수있는특징적인 것이다.

본래 이전하기전의 흔적으로 보아 앞쪽에는 바깥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튼 ㅁ자형의 배치를 한 것으로 보인다.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이렇게 기념사진도 찍고

 

싸릿문 앞에도 부부끼리 포즈도 취했어요 (처음 참석한 박효수 부부)

 

돌풍부부입니다 ㅎㅎㅎ

 

청풍 후산리 고가
이 집은 본래 청풍면 후산리 105번지에 있었던 민가였다.
충주댐의 건설로  198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 한것이다.  조선말기에 지어진 ㄱ자형의  팔작 기와집이다. 
대청마루를 기준으로 하여 동남을 향하고 있다.  대청의 우측에 2칸 크기의 건너방과, 툇마루를 높이 하고 그밑에 함실 아궁이를 두고 있다.

대청은 좌측으로 웃방이 있고 웃방에서 동쪽으로 꺾어 대청의 좌측으로 후퇴를 후보하여 제사방으로 꾸미고있다. 전체적인 내부의 배치가 특이하다.
중부지방의 보편적인 민가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늘막에서 잠시 담소도 나누고

 

김중명(金重明)에 대하여
1614년(광해군 6)∼1685년(숙종 11).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이회(而晦). 아버지는 빙고별검(氷庫別檢) 전(㙉)이다.
1645년(인조 23) 무과에 급제하고, 송시열(宋時烈)의 천거로 효종의 북벌계획에 참여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1671년(현종 12) 영흥대도호부사로 재직중에 관내의 사노(私奴)가 주인을 죽인 사건의 처리로 파직되었으나, 그뒤 다시 기용되어 경상좌도수군절도사병마절도사

역임하였다.

 

쉬엄쉬엄 쉬어가면서 여유를 즐겨봅니다

 

고인돌 유적지

 

충주호에 새롭게 건설되고 있는 현수교가 위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잔디밭에 털썩 앉아 사진도 찍고 ㅎㅎㅎㅎㅎ

 

벤치에서 정상길부부가 포즈를 취했습니다 ㅎㅎㅎ

 

보물 제528호, 청풍 한벽루(淸風 寒碧樓)의 시원스런 모습 

고려 충숙왕 4년(1317)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여 관아에서  세운 목조건물이며 연회 장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금병헌 : 지방유형문화재 제 34호

일명 "월명루"라고도 하며 조선 숙종 7년(1681)에 창건되었다.

청풍부의 동헌이며 부사가 집무하던 곳으로, 단청을 하지 않은 것으로 당시 부사의 검소한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원님앞에서 돌풍의 건방진 포즈 ㅋㅋㅋㅋㅋ

 

심장(하트)을 품은 소나무~~~~~~~~~~~하트모양이 보이나요

 

산꼭대기에는 성도 있고 팔각정도 있어서 충주호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충주호 전경

 

연리지와 연리목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맞닿은 채로 오랜세월이 지나면 서로 합쳐져 한나무가 되는 현상을 연리라고 한다.두몸이 한몸이 된다하여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과

흔히 비유하였다. 알기쉽게 '사랑나무' 라고도 부른다. 나무가지가 서로 이어지면 연리지,줄기가 이어지면 연리목이다.

연리목은 가끔 볼 수 있으나 가지가 붙은 연리지는 매우 희귀하다. 가지는 다른 나무와 맞 닿을기회가 적을 뿐만 아니라 맞닿더라도 바람에 흔들려버려 좀처럼 붙기

어렵기때문이다.  중국 전설상의 새와 나무인 비익조와 연리목에서 유래된 비익이라는 새는 암수의 눈과 날개가 각각 하나이기때문에 항상 나란히 한몸이 되어서 난다하며,연리라는 나무는 두 그루의 나무이지만 가지가 서로연결되어 나무결이 상통한다는데서 남녀간의 깊은 정분을 뜻한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는 당 나라 6 대황제 현종과 양귀비의 비련을 그린 장한가에서 <하늘에서는 비익조(비익조)가되고 땅에서는 연리지(연리지)가 되도다>라고 읊었다

 

산 정상의 팔각정인 망월루

 

유람선 선착장에서는 쉼없이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유람선이 분주하다

 

충주호를 배경으로

 

70여m의 분수쑈가 펼쳐지고 있는 충주호

 

청풍명월 문화단지 전경

 

날씨가 더워 아이스크림도 사먹고 땀을 식히고 있습니다 ㅎㅎㅎ 

 

금남루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호
           이곳은 청풍부의 아문으로 '도호부절제아문'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순조25년(1825)에 청풍부사 조길원이 처음 세우고 현판도 걸었다.  고종7년(1870)에 부사
           이직현이, 동 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각각 중수하고 1956년에도 보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의조성으로 인하여 198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정면3칸, 측면 2칸의 팔각집으로 팔각의 높은 돌기둥 위에 세운 2층의
           다락집이다.

 

청풍문화재단지 입구인 팔영루 전경

 

청풍문화단지 입구 안내판입니다

 

시내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입니다

2012년을 기약하면서 ~~~~~~~~~~~~

 

어느덧 돌풍도 창원에 도착을 하고 있습니다

 

2011년 전우들과의 만남이 짧은 1박2일이었지만 정말 즐겁고 재미있었던 날 이었습니다

2012년에는 좀더 멋진 모임이 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워 볼께요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모두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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