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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매산의 억새
발길 가는대로

2013년 돌풍의 설날

by 돌풍56 2013. 2. 18.

2013년 2월 9

명절 전 날이면 할 일 없는 남자들

돌풍도 마찬가지네 ㅎㅎㅎ

팔 베게로 텔레비만 보다가 지겨워 카메라를 메고 밀양으로 갔다

5분거리라 부담도 없지만 그래도 나름의 사진촬영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영남루와 가까운 고수부지에 주차를 하고

 

남천강변에서 영남루를 올려다 본다 

 

강 아래로 보이는 남천교를 지나 낮은 산을 넘어면 돌풍의 고향이다   

 

 밀양교(일명 뱃다리)에서 바라보이는 우측의 영남루

 

남천강과 영남루 전경 

 

남천강과 고수부지 

 

아랑의 원혼을 달래는 아랑각 전경

아랑의 성은 윤, 이름은 정옥이었으며, 그는 부친이 영남 밀양태수로 부임하였을 때에 수행하여 밀양에 갔다. 그 고을 통인(관리명)과 그의 유모 음모에 빠져서 아랑은 어떤 날 밤 영남루의 밤 경치를 보러 갔다가 통인 백가에게 욕을 당하였다. 그것은 아랑이 달 구경을 하고 영남루 위에 있을 때, 별안간 유모는 없어지고 기둥 뒤에 숨어있던 백가가 뛰어 나와서 아랑에게 연모의 정을 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랑은 그것을 거절하였다. 백가는 아랑을 죽여 강가 대숲 속에 던져 버렸다.

 

다음 날 태수는 여러 조사를 하여 보았으나 아랑을 찾지 못하고 마침내는 자기 딸이 야간 도주한 것이라 믿고 양반 가문에 그런 불상사가 일어난 이상 근신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벼슬을 하직하고 한양 본가로 갔다. 그 뒤로 신관 사또가 부임할 때마다 그 날 밤에 처녀귀신이 나타나서 신관은 비명횡사하고 만다.

 

이 때문에 밀양태수를 원하는 사람이 없어 지원자를 구하게 되었는데 이상사(지난날, 생원이나 진사를 가리키던 말)라는 사람이 지원하여 그 날 밤에 촛불을 키고 독서를 하고 있을 때 별안간 머리를 풀어헤치고 목에 칼을 꽂은 여귀가 나타났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앉아 있었는데 여귀는 그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애원하였다. 날이 밝자 그는 통인 백가를 잡아 족쳐 자백을 받아내고 아랑의 원혼을 달래 주었다. 그 때부터 사또의 객사에는 원혼이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지금도 밀양에는 아랑의 혼백을 모신 ‘아랑사’가 있다.

'아랑'을 추모하면서 아낙네들이 부른 노래 ‘아랑가’가 밀양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숲으로 가려진 무봉사 

 

영남루와 아랑각 (대나무숲속에는 아랑의 원혼을 모신 비석이 있다 

 

남천강에서 놀고있는 겨울철새들 

 

영남루를 오르는 계단이 특이하다 

 

 

 

영남루의 루각 내부는 개방되어 여름이면 피서지로도 각광을 받는 곳이다 

 

영남루(嶺南樓)는 보물 제147호로,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에 있는 누각으로 구 객사(舊客舍)의 부속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1844년에 다시 지어진 조선시대 후기 건물의 특색을 잘 반영한다. 옛날에 귀한 손님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던 곳으로,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한국 3대 누각 가운데 하나이다.

 

영남루는 동서 5간 남북4간의 팔작지붕으로 된 2층 누각이다. 동서 좌우에는 다시 각각 3간의 익루인 능파각과 침류각이 달려 있다. 문헌에 따르면 영남루는 옛적에 영남사의 절터인데 고려 공민왕 14년(AD 1365년)에 밀양부사 김주가 개창하여 절 이름을 따서 영남루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영남루는 신라 법흥왕 때 절을 지었다가 고려 현종 때 절을 없애고 종각이 없던 금벼루만 두었던 것을 고려 예종 때 영남루를 지었으며, 1366년 공민왕 14년에 김주가 중수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 뒤에 1460년 조선 세조 6년에 부사 강숙경이 누각의 규모를 키워 중건하였고 신숙주가 누기를 지었다. 1542년 중종 37년에 부사 박세후가 다시 중건하였다.

1582년 선조 15년 병화(兵火)로 대루와 부속당우가 불타버렸는데, 1637년 인조 15년에 부사 심흥이 재건한 것을 부사 이지온이 단청을 하였다. 1842년 헌종 8년에 실화로 소실한 것을 2년 뒤인 1844년에 부사 이인재가 재건한 것이 현재의 건물이다.

조선시대 후반기에 속하는 건물로서는 건축미와 규모면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부사 이인재가 중건할 때의 상량문은 추남 이장한이 지었으며, 준공한 뒤에 김홍근이 지은 상량문이 현판으로 걸려있다.

 

아리랑 기념비 

 

 

 

밀양이 낳은 작곡가 박시춘 선생 추모비 

1913. 10. 28 경남 밀양~ 1996. 6. 30 서울.

대중가요 작곡가.

 

본명은 순동(順童). 부유한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다분히 풍류적인 분위기를 즐기면서 자랐으며, 일본 유학시절 중학생의 신분으로 순회공연단을 따라다니면서 트럼펫·바이올린·색소폰 등 다양한 악기들의 연주방법을 익혔다. 특히 기타를 치는 솜씨가 뛰어났고 한때는 연예단에서 영사기돌리는 일을 하기도 했다. 우라타[浦田] 연예단 시절 〈몬테카를로의 갓난이〉·〈어둠 속에 피는 꽃〉 등의 곡들을 발표하면서 작곡가로 데뷔했다. 가수 남인수가 부른 〈애수의 소야곡〉이 히트하여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이후 1930년대말부터 1960년대까지 40여 년 동안 무려 3,000여 곡이 넘는 대중가요를 작곡, 수많은 히트곡을 내놓아 가요사의 산증인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사명대사 동상

조선 중기의 고승인 유정(惟政, 1544∼1610)을 말함. 풍천 임씨로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이다.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이다. 경상남도 밀양출신이며, 수성(守成)의 아들이다.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그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 선종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1578년부터 팔공산, 금강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으며,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의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포상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 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뒤 해인사에서 머물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7권과 『분충서난록』1권 등이 있다.

[원효대사 스토리뱅크]

 

복원된 밀양읍성

경상남도 밀양시 밀양읍성은 성종 10년(1479)에 만든 것으로, 다른 읍성들을 임진왜란 직전에 만들기 시작한 것에 비하면 100년 이상 일찍 만든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밀양읍성은 둘레가 4,670척, 높이 9척이며 성 안에 우물이 4개, 연못이 1곳 있다고 한다. 1902년 경부선 철도부설 공사 때 성문과 성벽을 모두 헐어 철도부설공사에 이용하여, 지금은 성문의 위치와 일부 성곽만 남아 있다. 아동산과 아북산을 잇는 산등성이에는 성곽이 남아 있다.  

 

 읍성에서 바라본 남천강의 두물머리

 

무봉사로 가는 길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원래 773년(혜공왕 9) 법조(法照) 대사가 현재의 영남루(嶺南樓:보물 제147호) 자리에 있었던 영남사(嶺南寺)의 부속 암자로 세운 것인데, 1359년(공민왕 8) 화재로 영남사가 소실되자 이 암자를 무봉사로 승격시켰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5년에 혜징(慧澄)이 새로 짓고, 1899년에 경봉(慶蓬)이 중건했으며 1942년에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삼성각·종루·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에는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의 석조여래좌상

대웅전에 들러 우리가족 모두의 안녕을 기원하고 부모님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대웅전

 

 

 

 

 

밀양교(뱃다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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