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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천만의 일몰
발길 가는대로

돌풍의 서울시티투어

by 돌풍56 2011. 6. 22.

2011년 6월 15일

전우와 함께 서울시티투어에 나섰다

구름 한점없는 맑은 날이 눈이 부시고 오전부터 그늘을 찾아 다녀야 하는 불볕더위다

 

광화문 동화면세점앞에서 승차권을 구입하고있는 전우 

 

오늘은 2층버스의 청계.고궁투어보다는 도심순환투어를 하면서 고궁만 둘러볼 계획입니다

 

투어코스

 

대한문

덕수궁(德壽宮)의 정문으로 원래는 대안문(大安門)이던 것을 1906년 7월 15일 수리 시 대한문이라 개칭하였다. 서울시 도시계획에 의한 제2차 도로확장 공사 때에 담장만을 궁내로 이전하여 도로상의 한복판에 분리 폐쇄되어 있다가 1970년 8월 21일 현 위치로 이설 공사를 착공하여 1971년 1월 2일 준공을 보았다.

2005년에 해체 보수공사를 하였다.

 

 

덕분에 이렇게 기념촬영도 하고 ㅎㅎㅎㅎㅎ

 

중화문

1902년 건립된 중화전의 정문으로 1904년 화재로 소실된 후 중건되었으며 좌우에 행각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동측에 일부만 남아있다

 

 

중화전 (보물 제819호)

고종황제께서 1897년에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이어하시면서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셨으나 협소하였으므로 1902년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으셨다.

본래는 중층건물이었으나 1904년 4월 14일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단층 건물로 중건되었다. 앞뜰에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있으며, 정문으로 중화문이 있다. 돌풍도 한 컷하고 ㅎㅎㅎㅎㅎ

 

 

중화전의 용상

 

덕수궁의 석조전

조선시대 궁중건물 중에서는 최초로 유럽풍의 석조로 건립된 건물이며 영국인 "하딩"이 설계하였으며 영국인 "데빗손" 감독 하에 1900년 기공되어 1910년에 준공되었으며, 특별한 건물명칭은 없이 "석조전"으로만 전해 온다. 고종(高宗)황제는 이곳에서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접견하거나 침전으로 사용하였다.


 

즉조당

준명당(俊明堂)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이 건물은 15대 광해군(光海君)과 16대 인조가 즉위한 곳이다. 1897년 고종의 경운궁 환궁 직후 정전으로 이용되기도 하여 한때 명칭이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2년 새로운 정전이 세워지자 다시 즉조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1904년 화재로 손실된 것을 그해에 다시 석어당, 함녕전과 같이 중건한 것이다. 고종의 후비인 순헌귀비 엄씨가 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이곳에서 거처하셨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덕수궁의 물개분수

 

광명문

1897년에 건립하였으나 1904년에 소실되었다가 중건된 목조건물로 당초 함녕전의 정문이었으나 1938년 미술관 개관 시 흥천사종과 보루각 자격루를 진열하기

위하여 현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한창 공사중인 서울시청

 

남산한옥마을 (엣 수도방위사령부 터)

이 곳 남산골 전통정원 내에는 그 동안 훼손되었던 지형을 원형대로 복원하여 남산의 자연식생인 전통 수종을 심었으며, 계곡을 만들어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였고, 또한 정자·연못 등을 복원하여 전통양식의 정원으로 꾸몄다

 

 

 

 

더위를 피해 팔각정이 아니 정자에서 휴식을 취하는 전우 채상수

 

서울시 타임켚슐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맞이한 오늘날의 시민생활과 서울의 모습을 대표할 수 있는 문물 600점을 캡슐에 담아 400년 후인 서울 정도1000년에 후손에게

문화유산으로 전하고자 함.

 

 

남산한옥마을 전경들입니다

  

 

 

모두들 더위를피해 그늘에서 휴식을 취합니다

 

 

 

 

 

개구장이 꼬마들도 한옥마을을 찾았네요 ㅎㅎㅎㅎㅎ

 

 

 

 

 

홍화문

창경궁의 정문으로 명정전과 마찬가지로 동향하였다. 조선 성종 15년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광해군 8년에 재건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의 건물로, 기둥 위에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이 놓이고, 다포계 양식(樣式)의 외오포작 이출목, 내칠포작 삼출목의 공포를 짜았는데, 견실한 구조와 공포의 짜임은 조선 초기 형식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정면의 3칸에는 각각 판문을 달고 그 위로는 홍살을 하였으며, 북쪽에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마련돼 있다. 이층은 우물마루에 연등천장을 꾸몄다. 홍화문의 좌우로는 궁장(宮墻)이 남북십자각을 지나 궁역을 형성하였다

 

 창경궁내부에는 앵두가 이렇게 빨갛게 익어서 한입 깨물어도 보고  ~~~~~

 

숲속에서 만난 청설모는 도망을 가지않네요

 

솔바람이 시원하게부는 궁의 뒤뜰에서 ~~~~~

 

궁궐과 빌딩이 비교되는 창경궁의 전경입니다

 

 

 

 

소나무숲으로 둘러싸인 대궐

 

 

함인정

이곳에는 원래 성종 15년에 지은 인양전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인조 11년(1633)에 인경궁의 함인당을 이건하여 함인정이라 한 것이다. 이곳은 특히 영조가 문무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팔각칠층석탑 - 보물1119호
춘당지 옆에 세운 탑이다. 일제 강점기 이왕가박물관을 만들 때 만주(滿洲)에서 가지고 온 상인으로부터 매입하여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몸돌에 “遼陽重/ 開山都/ 綱挺玉/ 巖壽塔”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며, “大明成化六年庚寅歲秋七月上澣吉日造”라고 기록되어 있어 1470년(성종원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8각의 평면 위에 7층의 탑신을 세운 석탑으로 전체 모습은 라마탑의 형태와 비슷하다.

창경궁은 고등학교때 수학여행을 온 이후 40년만에 찾아왔습니다

 

 

 

 

숭문당

이 건물은 조선 경종 때 건립되었으며, 순조 30년에 큰 불로 소실된 것을 그해 가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崇文堂'의 현판과 '日監在玆'라 쓴 게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영조는 특히 학문을 숭상하고 영재를 양성하였는데, 이곳에서 친히 태학생을 접견하여 시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연(酒宴)를 베풀어 그들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명정전

조선 성종 15년(1484)에 창경궁이 조성되고, 그 정전으로서 명정전이 세워졌다. 이곳은 임금님이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거나 국가적인 행사가 거행되었던 곳으로 1544년 인종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명정전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정전과는 달리 남향이 아닌 동향이다. 이는 창경궁의 지세에 따른 것이다. 그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8년(1616)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다른 궁의 정전과 같이 이중의 월대를 두어 그 위에 건물 기단을 마련하고, 큰 사각 주초 위에 원형의 운두 높은 주좌(柱座)를 조각하여 초석을 배열하였다

 

 

명정문에서 바라본 명정전

 

 

명정문

이 문은 명정전을 둘러싼 월랑 중 명정전과 마주보고 있는 동월랑의 중앙부에 있으며, 창경궁의 외문인 홍화문보다 안쪽에 놓여 중문의 기능을 갖는 평삼문이다. 위치로 보아서 명정전의 동서 중심축선상에 정확히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미터 벗어나 있다. 문의 좌우에 연결된 동월랑을 어느 정도 명정문에 맞추어 배치하였기 때문에, 이에 의하여 둘러싸인 명정전의 중정(中庭)은 정확한 방형이 아니고 기울어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다포계 건물인데, 잘 다듬은 원형 주초석 위에 중앙열의 주열(柱列)에는 각 칸마다 2매씩의 육중한 판문을 달아 안으로 열리게 하였다. 이 건물은 포작(包作)과 건축의 형식으로 보아 명정전과 함께 광해군 때 재건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옥천교

옥천교는 명당수가 흐르는 어구(御溝) 위에 설치한 다리다. 조선 왕궁은 모두 명당수 위의 석교를 건너서 정전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졌다. 옥천교는 길이가 9.9미터, 폭6.6미터와 두 개의 홍예로 구성되었는데, 홍예가 연결되는 중앙에 귀면(鬼面)이 조각되어 잡귀를 쫓고 있다. 다리 좌우에는 돌난간이 조각되었는데, 난간 가장자리에 법수(法首)를 세우고 네 개의 연잎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5칸을 형성하고, 한 장의 돌로 만든 풍혈판이 설치되었으며 돌란대가 얹혀 있다. 교상(橋床)은 장마루 같은 청판돌로 짜고 중앙에는 어도(御道)를 한 단 높게 만들었다. 이 다리는 1483년 조성되었다.

 

 

창경궁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이란 1418년에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궁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성종대 창건된 창경궁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고,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인조2년(1624) 이괄의 난과 순조30년(1830) 대화재로 인하여 내전이 소실되었다. 화재에서 살아남은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은 17세기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며,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왕궁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돈화문 (敦化門: 보물 383호)
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태종12년)에 처음 지어졌다. 지금의 돈화문은 1609년(광해군 원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敦化는 『中庸』의 大德敦化에서 가져온 것으로 '(큰 덕은 백성등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이층 문루에 종과 북이 있어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인정문 (仁政門: 보물 813호)

인정문에서 임금의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는데 연산군, 효종, 현종,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 임금이 여기서 즉위했다.

 

인정전 (仁政殿: 국보 225호 )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政殿)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국가의 중요 행사가 행해진 궁궐의 대표적 공간이다.
이러한 행사 때에는 인정전 앞의 품계석에 맞춰 동쪽에는 문관이, 서쪽에는 무관이 중앙을 향해 도열했다

1908년 전기시설이 가설되면서 인정전에 전등이 설치되었다.

 

 

인정전 내부의 용상

조선의 궁궐 정전에는 공통적으로 정면에 임금의 용상(龍床)과 나무로 만든 곡병(曲屛)을 두고 뒤에는 일월오악병(日月五岳屛)을 둘렀는데 일월오악도에는 해와 달,

다섯 개의 산봉우리, 폭포, 파도,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봉황 한 쌍이 새겨져 있다.

 
 

선정전 (宣政殿: 보물 814호)
임금이 평소에 국사를 논의하던 편전(便殿)이다.
임금은 일월오악도를 배경으로 중앙에 앉고 그 좌우로 문관과 무관이 자리잡으며 한쪽에서는 사관(史官)이 앉아 국사에 대한 논의를 세세히 기록하였다.
사관들의 기록을 사초(史草)라고도 하며 이를 토대로 실록을 편찬하였다. 이 건물은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낙선재(樂善齋)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가 하나의 일곽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통칭하여 낙선재라 부른다.
낙선재는 1847년(헌종 13년)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어졌다.
이 곳은 마지막 황후인 윤황후(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등이 1963년부터 1989년까지 거처하던 곳이다.
아름다운 화계(꽃계단)와 꽃담, 다채로운 창살들이 돋보인다.

 

대조전 (大造殿: 보물 816호)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왕비의 침전인 서온돌과 임금의 침전인 동온돌로 나뉘어진다.
이 건물은 용마루가 없는데 이는 용으로 비유되는 임금이 잠자는 곳에 또다른 용을 나타내는 용마루가 있으면 두 용이 충돌한다 하여 설치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1917년 이 건물이 불에 타자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을 옮겨다 지었다.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이 곳에서 승하하였다.
경훈각은 대조전의 부속 건물로 원래는 이층 건물이었으나 1917년 화재이후 경복궁의 만경전(萬慶殿)을 헐어 단층으로 옮겨 지었다.
수라간은 음식을 만들던 곳으로 내부는 조선 말 서양식으로 개조되었다.

 

희정당 (熙政堂: 보물 815호)
임금의 침실이 딸린 편전이었는데, 나중에 어전회의실로 사용 되었다.
1917년 대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의 건물은 1920년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을 옮겨 지은 것이다.
내부 응접실에는 서양식 가구가 놓여져 있다. 상방에는 해강 김규진이 그린 <금강산만물초승경도>,<총석정절경도>가 걸려 있다. 남행각 정문은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변형되었다.


 

청와대사랑채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심장부인 청와대를 중심으로

역대 대통령들의 발자취와 수도 서울의 발전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청와대 사랑채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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