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의 석가모니불
돌풍이 올해부터 블로그에 " 석가모니 초보 " 라는 카테고리를 운영하고자 한다
항상 산행을 하면서 절에 들리게 되지만 불교에 관심만 있었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단순한 구경꺼리에 지나지 않았는데
몇 십년을 불교에 심취한 아우로 부터 이것저것 설명을 듣고보니 뭔가 부족함을 느껴 공부를 하고 싶었다
절에는 부처님이 있다는 것과 우리 고유의 멋을 살린 절의 구조와 형태만 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에
정신수양으로 심신을 달래고 보다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고 싶기에 석가모니의 품을 찾아 들어가 본다
석가모니불
불교의 창시자. 생몰년에 관해서는 BC 463∼BC 383년설과 BC 563∼BC 483년설이 있다. 네팔 남부가 인도대평원으로
이어지는 위치에 있었던 카필라성(Kapila城)을 중심으로 사카족의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그 국왕인 정반왕(淨飯王)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석가라는 호칭은 이 종족이름에서 연유되며, 존칭하여 석가모니라 불리는데,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성은 고타마, 이름은 싯다르타이다. 흔히 각자(覺者;깨달은 사람)를 뜻하는 보통명사를 고유명사화하여 불타(佛陀;Buddha)
또는 불(佛)이라 하며, 다시 여래(如來;진리의 완성자) 또는 승자(勝者;Gina)라 하기도 한다.
80년의 생애는 분명한데, 몰년에 관해서는 BC 483년 무렵과 BC 383년 무렵의 2가지 설이 유력하다.
사카족은 네팔계, 따라서 몽골계 인종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나,
당시 이미 압도적인 인도-아리아문화 영역내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19세기에는 계몽사상 등의 영향 때문에 석가의 실재(實在)에 대해 의심을 품기도 했으며, 천문학상의 여러 설과
태양신화를 근거로 석가의 전기를 설명하는 학자도 있었다.
1898년 네팔의 남쪽 국경에서 하나의 납석단지[蠟石壺]가 발견되었는데, 그 표면에 새겨진 BC 3세기 이전의 글은
이것은 석가족의 불(佛), 세존(世尊) 유골의 그릇이며, 명예로운 형제자매 처자들의 봉납(奉納)>이라고 해독되었다.
이는 원시경전의 내용과 일치하기 때문에 오랜 전승(傳承)이 여기서 확증되었다.
그 밖에 1896년에 발견된 아소카왕 비문은 석가의 탄생지 룸비니를 증명하며, 후에 다른 뼈단지[骨壺]를 발굴한
것도 있으니, 석가의 실재(實在)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오늘날의 문헌학을 종합한다면 가장 오래된 경전은 석가의 손제자(孫弟子) 무렵에 성립했다고 한다.
즉 석가 입멸 직후에 불제자가 모여서 석가의 언행을 편집(이를 제 1 결집이라 함)하여, 그것이 구송(口誦)으로 전승
되었고, 또한 확대되었다. 시대의 경과와 전파과정에서 잘못 전해지고 분식되었으며, 또한 증광(增廣) 및 변경되기도
하였다.
특히 석가에 대한 사모·존숭·신앙이 강화되어서 석가를 신비화하고 공상화했으며, 때로 잡다한 요소가 부가되었다.
또한 교설(敎說)도 나중의 발전 성과와 뒤섞였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초기 경전은 모두 석가의 입멸 후 100년 내지 200년 무렵에 교단이 보수파인 상좌부(上座部)와
진보파인 대중부(大衆部)로 분열하고 다시 여러 갈래로 분열한 끝에 성립한 20여 개 부파 중 몇 개 부파에서 확정한
것인데, 석가의 직접적 가르침을 가려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석가는 마가다어로 가르침을 전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마가다어는 팔리어와 표준어인 산스크리트로 바뀌었고,
산스크리트는 다시 다른 속어(예컨대 간다라어 등)로 옮겨졌다.
또한 많은 것이 한문으로 번역되었으며, 일부는 티베트어로 번역되었다.
또한 일부이기는 하지만 위의 고어 사본 단편이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마가다어는 팔리어 문헌에 조금 그 어형을 남겼을 뿐이고, 마가다어의 종합된 텍스트는 현존하지 않는다.
이 초기 경전군을 아가마(Agama;傳來)라고 한다.
1, 출가(出家)와 성도(成道) 아가마에서는 석가의 전기(불전)에 대한 관심이 적었기 때문에 단편적인 회상(回想) 및
상상력에 의해 불전이 창작되었고, 그 종류도 늘어났다.
오늘날 전해지는 불전은 모두 그것들에 바탕을 둔다. 석가는 생후 7일 만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이후는 이모의
손에 자랐다.
왕자로서의 교양을 쌓았으며, 16세에 결혼하여 아들을 하나 두었다. 그러나 부유한 생활을 버리고 괴로움의 본질
추구와 그 해방인 해탈을 목표로 29세 때 출가하였다.
갠지스강변의 선인(仙人) 2명을 찾아가 그 선정(禪定)을 배웠으나 마음에 흡족함을 느끼지 못하고 다시 가야라는
고장의 산림에서 고행을 시작하였다.
극단적인 금식 아래서 고행은 6년간 이어졌다. 지친 몸과 마음을 가누기 위해 산림에서 나온 석가는 마을 소녀가
주는 젖죽을 받아먹고 체력을 회복한 다음 부다가야의 보리수 밑에서 사색에 잠겼다.
여기서 깨달음을 얻어 성도(聖道)를 완성하였다.
2 ,설법 석가는 베나레스 북쪽에 있는 녹야원(鹿野苑)에서 지난날 고행을 함께 하였던 5명의 출가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교화되어서 불제자가 되었다. 승가(僧伽)라 하는 교단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석가는 요청을 받는대로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나가서 전하였고, 그들의 물음에 대답해 주면서 설법교화
의 여행을 하였다.
경전에는 이때의 불제자가 1250명이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그것을 초과한 듯하다.
그러나 석가는 자설전도(自說傳道)나 교단 설립의 의도는 없었기 때문에 민중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만 여행
하였다.
입멸한 뒤 민중들에 의하여 화장되었고, 그 유골(佛舍利라 한다)은 여러 왕들에게 나누어져 8군데에서 모시게
되었으며 스투파(塔)를 세우게 되었다.
석가의 직접적 교설은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원시불교 교설의 원형 내지 핵을 간단히 들어보면
① 현실직시와 그에 의한 다양성 승인
② 마음을 평정하게 하고 주체적인 자기를 확립하며, 아집과 자기중심은 버린다.
③ 일체의 평등
④ 실천을 목표로 하고 논의의 우열을 다투지 않는다.
⑤ 보편적인 법을 중심으로 한다.
⑥ 삼법인(三法印)
⑦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제(四諦)와 팔정도(八正道)
⑧ 오온(五蘊)
⑨ 육입(六入)
⑩ 연기(緣起)
⑪ 니르바나(nirvna;열반)가 바로 해탈·깨달음의 경지이다.
하늘나라에서 세상을 살피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겁(세월)동안 수많은 생을 통하여 부처님이 되기
위한 수행과 공덕을 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도솔천에 계시면서 세상에 나아갈 때를 기다리며 세상을 살펴보셨습니다. 카필라국의 슛도다나왕과
마야부인이 어질고 덕행이 뛰어남을 아시고 마야부인의 꿈에 흰 코끼리를 탄 모습을 나투어 두분을 통해 이 세상에
오실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부처님 세상에 오시다.
지금부터 2500여년 전, 갖가지 꽃이 만발하고 향기 가득한 룸비니 동산에서 부처님은 태어나셨습니다.
처음 태어나자 사방으로 일곱걸음을 옮기시고 한 손은 하늘을, 한 손은 땅을 가리키시며 "하늘과 땅 위에 나 홀로
존귀 하네(天上天下 唯我獨尊)" 라고 외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자기존엄, 인간존엄, 생명존엄의 선포요, 우리들 모두는 신성하고 무한 절대한 생명의 주인이라는 선서
였 던 것입니다.
네 문에서 만난 사람들
어린 싯다르타는 자상하게 양육되고 훌륭하게 교육되었으며,
열 아홉 살 되던해에는 야쇼다라를 아내로 맞이하여 안락하고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하였지만 그는 점점 깊이 인생
의 문제에 관하여 명상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봄날 싯다르타는 성의 동문으로 나아가다가 늙은 노인을 보았으며,
인간은 반드시 늙어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아왔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남문에서 병든 자를, 서문에서 주검의 행열을, 그리고 북문에서는 출가수행자의 잔잔한 미소를
발견하 고는, 늙고 병들고 죽음을 생각하고 또 자기가 가야할 길을 느꼈습니다.
카필라의 성을 넘어
싯다르타가 스물 아홉살이 되었을 때 아내 야쇼다라가 아들 라훌라를 낳았습니다.
그는 이를 계기로 다시한번 인생의 문제에 대해 회의하게 되었으며, 늙음과 병듦과 죽음을 벗어난, 그리고 슬픔과
고뇌가 없는 길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궁중에서 큰 잔치가 베풀어 지던 날 밤, 그는 아내와 아들과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말없는 작별을 고하였습니다.
마부 찬타카를 깨워 애마 칸다카를 타고 카필라 성벽을 넘어 어둠을 뚫고 달려 갔습니다.
그는 때묻고 얼룩진 껍데기를 벗어나 새롭고 영원한 기쁨을 찾아 출가한 것입니다.
가야산의 숲속에서 싯다르타.
이제 그는 왕자가 아니었습니다. 맨발로 걷는 구도자, 빛을 찾아가는 수행자 였습니다.
그가 찾아간 여러 선인들에게서 그는 갖가지 고행과 선정을 닦았지만, 그것이 죽음과 삶의 문제 를 해결해 주지
못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혼자 설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가야산의 고행림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강물도 마르게 하고 몸의 피까지
마르게 하는 가시밭길, 과거 현재 미래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고행의 짐을 지고 싯다르타는 나아 갔습니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의 속박에서 나와 당신과 우리 모두를 풀어내려는 자유의 길 해방의 길을 그는 걸어갔던 것입니다.
보리수 아래의 빛나는 새벽 별
죽음을 뛰어넘을 고행을 통해서도 싯타르타에게는 빛나는 진리의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길이 아닌 다른 길, 옥심을 따르는 쾌락의 길도 아니고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의 길도 아닌 중도의 길이 바른길
임 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자타의 공양을 받고 기운을 회복한 싯타르타는, 부다가야의 보리수 나무아래 앉아 깊고 고요한 명상에 들어갔
습니다.
그의 나이 서른 다섯 되던 해 12월 8일, 그는 쌓였던 어둠과 장애를 넘어섰습니다. 싯다르타는 부처가 되신 것입니다.
감로의 문이 열리다.
대 진리를 이루신 부처님은 먼저 누구에게 이 법(眞理)을 설할 것인지를 생각하셨읍니다.
그리곤 가야산에서 함께 고행하다가 그를 비난하고 떠나간 다섯 수행자를 생각해 내시고, 2백킬로나 떨어진
베나레스 를 향해 떠났습니다.
베나레스의 근교 녹야원, 이곳에서 다섯명의 수행자를 향해 부처님의 최초의 가르침은 베풀어졌습니다.
그 가르침은 두 극단을 뚜어넘는 중도의 길이었고, 세상의 고통과 고통의 원인(집착) 과 이를 벗어난 평화(滅)와
그에 이르는 방법(도)에 관한 것이었으며, 그 방법은 바로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8正道)을 힘써 수행하는 것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쿠시나가라의 사라나무 아래서 부처님의 길,
그것은 만인을 위한 땀과 피와 눈물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광과 승리와 기쁨의 길이기도 했습니다.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이 있듯이 부처님의 발길, 눈빛,
목소리 는 모든 이들의 고통과 항상 함께하는 빛이었습니다.
진리의 문을 여신 지 여든해, 열반의 땅 쿠시나가라에서 부처님은 그 장엄한 생애를 거두셨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등불로 삼고 법(眞理)을 등불로 삼아라, 모든 것은 변화하나니 게으름 없이 힘써 정진하라"라는
마지막 가르침을 남기시고. 열반에 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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