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1일
정말 오랫만에 진주 촉석루로 봄 나들이를 갔다
아침 날씨가 너무 흐려 겨울 외투차림으로 갔었는데 이 놈의 날씨가 돌풍을 잠재우고 말 줄이야 ㅎㅎㅎㅎㅎ
진주성은 좌회전이네
진주성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의 성지(聖地)이다. 본시 토성이던 것을 고려조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석축하였다. 조선조 선조 24년(1591) 7월, 경상감사 김수(金수:1537∼1615)는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外城)을 쌓았다. 동 25년(1592) 10월,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1554∼1592)이 3,800명의 군사로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인 계사년(1593) 6월에는 전년의 패배를 설욕코자 10만 여명이 또 침략하여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서문매표소와 언덕위에 성문이 보인다
성문을 들어서니 정면에 호국사가 보이고 ~~~~~
호국사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는 이 절은 원래의 이름이 내성사(內城寺)였다고 한다. 고려말기에 왜구(倭寇)를 막기 위해 진주성을 고쳐 쌓고,승병(僧兵)을
기르기 위해 창건..
호국사 전경
서장대에서 바라본 천수교와 남강
서장대
장대는 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는 대를 가리킨다.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이 장대는 진주성 서문에 속하는 곳이다. 『여지도서』에 보면 회룡루로 나오며, 규모는 작으나 진주성의 남장대인 촉석루와 같은 다락집형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건물은 허물어진 것을 1934년 서상필씨가 새롭게 고쳐지은 것으로, 앞면 3칸·옆면 2칸의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목조 기와집이다
조선시대의 천자, 지자, 현자총통
3,1절 날에 3,1독립운동 기념비를 보고
진주성의 가장 전망이 좋은 포토죤에서
성과 촉석루 그리고 말없이 흐르는 남강의 진주교
포토죤에서 돌풍
뒤돌아본 남강의 천수교
진주교와 의암바위
촉석루의 정문인 촉석문
촉석루
남강 변 벼랑 위에 있는 이 누각은 진주성의 남쪽 장대(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던 대)로서 장원루라고도 한다. 고려 공민왕 14년(1365)에 세운 후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로 사용하였고, 평상시에는 과거를 치루는 고시장으로 쓰였다. 현재의 누각은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에서 재건한 것으로 앞면 5칸·옆면 4칸이다.
촉석루는 일반인들의 누각 입장을 허용하고 있다
촉석루각의 마루
촉석루의 현판들과 단청
의기사
의기사는 조선조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의기 논개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인조 7년(1629) 진주의 선비들은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전각하였고, 경종 2년(1722)에는 그 위쪽에 「의암사적비」를 세웠다. 영조 16년(1740) 병사 남덕하(南德夏:1688∼1742)는 의기정포(義妓旌褒)를 계청하여 왕의 윤허를 받아 의기사를 창건하였고, 이후 세 차례의 중수와 중건이 있었다.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의기창렬회에서 시민의 성금으로 재건하였다.
촉석루에서 의암바위로 내려가는 석문
의암
의암은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이다. 조선조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논개는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유인하여 이 바위에서 순국하였다. 이에 논개의 순국정신을 현창하기 위해 영남사람들이 의암이라고 명명하였다. 인조 7년(1629) 진주의 선비 정대륭(鄭大隆:1599∼1661)은 바위의 서쪽 벽면에 의암이라는 글자를 전각하였고, 남쪽에는 한몽삼(韓夢參:1598∼1662)이 쓴 것으로 전하는 의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의암의 바닥 넓이는 3.65m×3.3m이다. 옆의 암벽에는 “한 줄기 긴 강이 띠를 두르고, 의열은 천년의 세월을 흐르리라...
의암바위에서 포즈를~~~~~
의암사적비 (義巖事蹟碑)
의암과 마주하고 있으며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시(詩)가 새겨져 있다.
" 그 바위 홀로 서있고 그 여인 우뚝 서 있네
이 바위 아닌들 그 여인 어찌 죽을 곳을 찾았겠으며
이 여인 아닌들 그 바위 어찌 의롭다는 소리 들었으리요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하리
의암 바위방향에서 본 촉석루
촉석루 전경
임진대첩계사순의단
진주대첩에서 순국한 7만민, 관, 군의 충혼을 위령하기 위하여 1987년에 국란극복의 표상으로 건립하였다.
공북문
공북문은 17세기 이후에 그려진 진주성도에 나와있는 진주성의 정문으로 拱은 손을 모아 가슴까지들어올려 공경한다는 뜻이며 北은 임금이 계시는 북쪽인 북두를
뜻하는 것으로 2002년 5월1일홍예식 2층 다락루로 복원하였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상
왜군 2만이 침략해 오자 김시민장군이 3800명의 군사와 성민이 힘을 합쳐 물리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공북문 전경
굳게 닿힌 성문
“이루어질 수 없던 애달픈 사랑의 전설, 용다리”
진주성 동문 쪽에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는 용다리가 있는데, 여기엔 슬픈 사랑의 전설이 서려있다. 고려 초 진주의 한 마을에 딸만 셋인 이씨 성을 가진 군수가 있었는데, 청상 과부가 된 둘째 딸이 친정에 돌아와 수절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돌쇠라는 하인과 서로 좋아하게 되었는데, 신분의 차이가 엄격하던 시절이라 그 딸은 상사병을 앓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씨가 죽자 돌쇠는 슬픔에 겨워 미쳐버렸고, 결국 용다리 옆 고목나무에 목을 매고 아씨를 따라갔다. 그때부터 용다리 아래에 수천 마리의 개구리가 울기 시작하였는데, 부부가 지나가면 울음을 그쳤으며, 상사병에 걸린 사람이 용다리를 두 번 왕래하면 씻은 듯이 나았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북장대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이 장대는 진주성 서북쪽의 높은 언덕에 있으며, 이곳은 서쪽과 북쪽 일대를 한 눈에 내다볼 수 있는 요충지대이다. 이곳은 내성 북쪽 끝 제일 높은 곳에 있어서, 낭떠러지 밑의 성밖은 물론 성안과 외성에 주둔한 병사까지도 지휘할 수 있었다. 현판의 이름도 이와 연관하여 진남루, 혹은 공북루라 하였다. 북장대는 임진왜란 때 손상된 것을 병마절도사 남이흥이 새롭게 고쳐 지은 건물이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군사 건물 중에서 조선 중기에 속하는 다락집형으로 후대에 세워진 군사건물의 모범이 되고있다.
북장대의 측면
국립진주박물관
1984년 11월 개관하였으며, 1998년 1월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으로 재개관하여 임진왜란 관련 유물 8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2001년 11월 재일교포 김용두선생의
기증품 100여점을 전시하는 두암관을 개관하였다.
포루
진주성을 방어하던 포진지이며 선조40년(1607년)에 진주성 내.외성에 포루 12좌를 설치하였으나 1969년 진주성을 복원하면서 상징적으로 1개소만 복원하였다
진주성과 포루
진주성을 서쪽에서 남쪽 동쪽 북쪽 방향으로 한바퀴를 돌고 도착한 서문
이렇게 가까우면서도 멀게만 느껴졌던 진주성에서 집사람과 즐거운 봄나들이를 보냈지만 날씨는 봄이 아닌
초 여름만큼이나 덥게만 느껴졌던 하루였었다
역사가 살아 숨쉬는 진주성
한가한 여유를 즐길 이러한 날들이 더 많았으면 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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