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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매산 철쭉
나의 가족들

보고싶은 아버지

by 돌풍56 2023. 1. 17.

2023년 1월 16일

 

그동안 잊고 있었던 아버지가 갑자기 보고 싶어 진다

1987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삶도 어쩌면 운명이 아니었던가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타고난 운명을 이기지 못하고 엄마를 힘들게 하시고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가 돌풍에게는 너무 가슴이 아프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돌풍이 나이가 들어가 직장을 퇴직하면서부터 기억이 되살아 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당시 47세였던 것으로 알고 있음)

돌풍이 까마득히 어렸던 시절

아마 돌풍의 기억 속에는 우리 부모님이 동네 뒤편 오막살이를 떠나기 위해 동네 맨 앞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짓고 있던 나이 5살 정도의 어린 시절이었던 것 같다. 목수들이 기둥을 만들기 위해 땀을 흘리면서 대패질을 하고 있을 때 돌풍은 그 매끈하게 깎여 나오는 대팻밥을 주어 아버지께 자랑하고 귀여움을 떨었던 기억과 내가 너무 그 사이를 비집고 다니니까 어르신들이 순사가 잡으러 온다고 하면 총알같이 집뒤 툇마루밑에 숨어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다 집이 마무리되고 초등학교 1학년쯤 되었을 때인 것 같다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아버지의 다리에 검은 털을 뽑아 아버지가 아프다고 했었던 기억, 그리고 교육보험의 증서를 보여주면서 나중에 유학을 보내주려고 하고 있다는 아버지의 높았던 돌풍에 대한 사랑이 형제자매들 누구보다도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음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우리 집은 크게 ㅁ자 형태였으며 윗채와 아랬채는 기와집이었으며 방앗간을 하던 우측과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대문밖에는 또 큰 밖의 마당(당시 동네사람들은 백구마당이라고 불렀음)이 있어 동네의 큰 일이나 행사는 우리 집 백구마당이 아니면 할 곳이 없었다 

 

엄마 아버지 그리고 형님과 누나 그리고 돌풍 (갓난아기가 돌풍 임) 사진 촬영은 1956년도

 

그래서일까

국민학교 3학년 때쯤 여동생과 함께 아버지가 학교에 갔다 오면 극장 구경을 데리고 간다고 해서  난생처음 영화구경을 했었는데 그 영화제목과 줄거리가 눈에 선 하고 보이는 듯하다 영화제목이  "피리 불던 모녀고개 ".

그러나 그때의 추억이 어쩌면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추억으로 변할 줄이야

영화구경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엄마가 묻는다

영화 보고  또 어디에 갔다 왔냐고 했다 ~~~~~~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뒷골목으로 올라가서 어느 대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중략)

그제야 우리 엄마가 참 아픈 삶을 살고 계신 줄 알게 되었지만 어린 나로서는 그렇게 어쩔 도리도 없었다. 그 이후로도 아버지는 지방의 온갖 감투를 쓰다 보니 사랑방에는 빙 돌아가면서 감사장과 위촉장 그리고 상장이 도배를 하고 있었고 봄가을이면 이장들의 야유회 사진을 한 묶음 받아오는 날이면 나를 아버지의 무릎에 앉히고는 한 장 한 장 사진설명을 해 주시곤 했었다. 그때 돌풍의 눈에 띈 사진이 하얀 한복을 입고 장구를 앞에 둔 여자들과  남자인 이장님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몇 년째 동네구장(이장)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 이 여자들은 뭐 하는 사람들이에요?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기생들이라고 했다. 기생이 뭐 하는 사람인데요?  우리하고 놀 때 춤추고 노래하고 장구 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참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는 자랑스럽게 설명을 하셨지만 지금 생각하면 고개가 갸우뚱 그려지기도 한다

 

돌풍이 국민학생(초등생) 되었을 때 가을이면 우리 집 연못이 저수지에서 흘러가는 개울옆에 붙어있어 아침부터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이 모두 모여 뚜레로 물을 퍼서 미꾸라지를 잡는데 큰 대야에 가득 잡아 우리 집에서 추어탕을 끊이고 엄마는 국수를 삶아 돌풍이 학교에 갔다 오면 우리 집은 대청마루와 마당에 동네사람들이 모두 모여 추어탕에 국수를 말아먹는  행사가 열리곤 했었기에 지금도 돌풍은 그때의 추어탕국수를 잊지 못해  종종 추어탕에 국수를 말아먹곤 한다

어린시절 남들은 아무리 신어도 떨어지지않는 타이어표 검정고무신을 신고 학교를 다녔지만 돌풍은 검정고무신을 한 번도 신은적도 없고 운동화와 파랑색과 흰색이 조합된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돌풍의 어린시절은 금수저와 다름없는 시절이었으니 어찌 행복했다고 하지 않을수 있으랴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쨌든 아버지의 바람기로 우리 집은 급격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1년을 쉬고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군대 전역 후 직장을 구하기 위해 부산으로 가게 되었으며 다시 거제도 대우조선 훈련생을 거쳐 훈련소수료후 곧바로 대우조선에 정직원으로 취업이 되고 10년 후 다시 대우국민차 선발대로 발탁되어 일본에서 1년간 연수를 끝내고도 또다시 관리자로 언 8개월을 일본에서 보내고 35년간의  직장을 정말 남 못지않게 승승장구하며 보내고 나니 딸과 아들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 

 

정말 잘 자라준 아들과 딸 들이 자랑스럽고 국내 최고의 엘리트직장에서 근무하는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딸내미와 사위가 고맙기 그지없다. 하지만 지나간 세월이 안타까운 것은 엄마와 아버지가 함께 정답게 삶을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갑자기 아버지가 그리워지곤 한다

 

40대의 엄마와 아버지 원본사진 임

 

아버지!

돌풍이 어렸을 적 아버지의 인자하셨던 모습이 자꾸만 떠 오릅니다

돌풍이 지금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의 나이를 넘어섰기 때문일까요 

 

자꾸만

자꾸만 

아버지가 그리워집니다.

 

아버지 !

정말 보고 싶습니다

 

 

참고로 정말 한평생을 자식들을 위해 고생하신 엄마에 대한 글은 엄마의 장례식에 대한 글에 먼저 올렸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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