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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 가는대로

영남대학의 민속촌을 둘러보고

by 돌풍56 2022. 9. 15.

영남대학교 내에 민속촌이 있는 줄을 몰랐었는데 추석 전 빅토리아 연꽃을 촬영하러 갔다가 자투리 시간에 교정을 구경하다가 소나무 숲 속에 기와집을 발견하고 다가갔더니 생각지도 못했던 민속촌이 있었네 ㅋㅋㅋ

 

 

소나무 숲 사이로 정자가 보이고
민속촌으로 가는 길
우측에 이렇게 민속촌 안내판이 보인다
민속촌 안내도
구계서원

△구계서원(龜溪書院)

구계서원은 고려말 유학자인 역동 우탁(1262~1342) 선생을 모시기 위해 1696년(숙종 22년)에 건립했다. 원래 경북 안동시 월곡면 미질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5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왔다. 1871년(고종 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됐다가 1897년에 강당만 지어 독 역재(讀易齋)라 명했다. 영남대학교 민속촌으로 옮길 당시에는 강당인 독역재 밖에 없었으나, 2000년 11월에 신위를 모신 묘우(廟宇)인 묘현사와 내삼문, 동·서재인 일신재와 시습재, 대문인 진덕문을 복원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원래 위치(原所在地) : 경북 안동군 월곡면 미질동

 

 

 

쌍송정

△쌍송정(雙松亭)

쌍송정은 봉화 금씨 금혜(1399~1484)가 노후에 은거하며 성리학을 강수 하던 곳이다. 쌍송정은 2001년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25호로 지정된 쌍송 정정 침(雙松亭正寢)의 부속건물인 별당으로 경북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에 위치해 있었다. 이후 쌍송 정정 침은 원소재지에 있고 쌍송정만 후손들의 소개로 1975년 7월 영남대 민속촌으로 옮겼다. 금혜선생은 호를 쌍송 정이라하고 이 건물 앞에 용트림하는 소나무 두 그루를 심어 즐겼는데 건물 이름 역시 이로부터 유래됐다. 이 건물은 약 300년 전에 다시 세운 것으로 1821년(순조 21년)에 허물어진 곳을 크게 한번 손질한 후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수리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일휴당

△일휴당(日休堂)

일휴당은 퇴계 이황의 문인인 금응협(1526~1586)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별당이다. 금응협 선생의 본관은 봉화, 자는 협지, 호는 일휴당이다. 안동 출신인 금응협 선생은 쌍송정 금혜 선생의 후손이며 벼슬은 익찬을 지냈다. 서애 류성룡이 일찍이 “금응 협의 행실이 바로 소학 그 자체”라고 칭찬할 정도로 일휴당 선생의 품행이 단정했다고 한다. 이 별당은 경북 안동시 예안면 오천동에 있었으며, 안동댐이 건설됨에 따라 1974년 11월 영남대 민속촌으로 이전 복원됐다. 일휴당이란 당호는 금응 협의 호에서 비롯된 것이며, 지금의 건물은 1787년(정조 11년)에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경주맞배집

△경주맞배집

경주맞배집은 경북 경주시 구황동의 황룡사지에 있었던 전통가옥이다. 황룡사지 발굴로 인해 1976년에 영남대 민속촌으로 이전 복원됐다.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맞배기와집으로, 평면은 좌측으로부터 부엌, 안방, 대청, 건넛방이 연결된 일자형 건물이다. 대청의 앞쪽에 굽널이 달린 세살문을 설치해 마루방을 이루게 했는데 이렇게 대청을 마루방으로 만드는 것은 경주, 포항, 영천 등지에서 볼 수 있는 지역적 특성 중 하나다.

 

 

 

화산서당

△화산서당(花山書堂)

1989년 5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0호로 지정된 화산서당은 만회당 장경우(1581~1656) 선생이 1651년(효종 2년)에 후진 양성을 위해 경북 칠곡군 석적읍 성곡리 화산 아래에 세운 건물이다. 지방 사림의 뜻에 따라 1840년(헌종 6년) 석적읍 중리로 옮겨 지으면서 사당을 새로 지어 제사 지냈다.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돼 강당과 양예청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2008년 12월 화산서당 소유주인 인동 장 씨 문중과 영남대학교가 화산서당 이전 복원을 위한 기증 협약을 체결하고 2009년 초 이전 복원하는 공사를 시작해 2009년 11월 화산서당의 대문채와 강당을 준공했다.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서당으로는 비교적 규모가 크다.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꾸민 중당 협실(中堂夾室) 형태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꾸며졌다.

 

 

의인정사

원래 위치 : 경북 안동군 도산면 의인 마을

의인 정사는 조선조 성리학性理學의 큰 스승(大儒)인 퇴계退溪 이황李晃 선생의 후손으로 진보 현감을 지낸 이중철이 1887년에 지은 집이다. 이 집의 택호宅號는 진보 댁眞寶宅이었으나 1976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면서 이 집이 있었던 의인 마을의 이름을 따서 의인 정사라 하였다. 이 집은 모두 56칸으로 전형적인 안동安東 양반兩斑집의 하나이다. 안채, 사랑채, 아래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랑舍廊채는 바깥에 개방(外部開放) 하여 남성 공간男性空間의 중심으로 삼았다. 집 입구(家屋入口) 대문 옆에는 행랑行廊채를 세우고, 안채 부엌(饌房) 뒤편(後面) 외진 곳에는 찬모 방饌母房과 디딜방아 간을 두었다.

 

 

 

교내 민속촌에는 벼가 여물어 가고 있다
까치구멍집

△까치구멍 집 까치구멍 집은 지붕 용마루의 양쪽에 공기의 유통을 위해 구멍을 낸 모양이 까치둥지와 비슷하다해서 붙은 이름이다. 영양 남 씨들이 모여 살았던 안동시 월곡면 도목동에서 1975년에 영남대 민속촌으로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경북 북부지역 산간촌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집이다. 이 집은 안방과 사랑방, 정지, 마구간 등을 모두 집 안쪽에 위치하게 해, 겨울철에는 난방의 열을 이용해 가축을 보호하는 등 사람과 가축이 하나의 지붕 아래 공간을 구획하면서 함께 살도록 된 집중형 주거의 대표적 사례이다.

 

   

(위 문화재에 대한 설명은 2022년 3월 15일 대구일보에서 발췌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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